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에다 토시이에 (문단 편집) == 평가 == 원래 거칠었던 토시이에의 성격도 나이를 먹으면서 온유해졌고 이 때문에 많은 사무라이들과 다이묘들이 토시이에를 좋아했다. 대표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서로의 신분이 낮았을 때부터 부부 단위로 교우를 가졌으며 토시이에가 히데요시의 신하가 된 후로도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친구로서 사귀었다고 한다. 일본을 통일한 이후 폭군이 된 히데요시도 토시이에의 간언만큼은 들어주었다는 설화가 남아있을 정도이며 말년에 히데요리를 맡긴 것도 그러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. 도요토미의 신하가 된 후에는 실력자가 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인망이 모였는데 히데요시 사후 둘로 갈라진 무단파와 문치파 모두 토시이에의 말만큼은 거스르지 못했으며 이에 따라 전일본 중에서 유일하게 양자의 중재역을 맡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. 이 때문에 히데요시의 사후 야심이 있었으면 일본을 가질 수 있었던 인물이라는 평도 있으며 도쿠가와도 그를 감당하지 못하고 토시이에가 죽은 후에야 직접적인 행동에 옮겼다. 반면에 가족관계에는 다소의 불행이 있어서 원래 4남이었던 그가 마에다가의 가독을 잇게 된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말들이 있다. 당시 마에다가의 가주였던 토시히사가 병약하여 병역을 치룰 수 없다는 이유로 세력확장 때문에 인재가 아쉽던 노부나가가 그의 등을 밀어준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지만 토시이에가 음모를 꾸며 노부나가에게 탄원하여 그렇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. 어쨌거나 갑자기 쫓겨나게 된 토시히사로서도 납득하기 힘든 일이었기 때문에 양자의 관계는 악화되었으나 후에 토시이에와 화해하기 위해서인지 토시히사는 출가[* 출가한 사무라이는 가문의 일에는 직접 연관되지 않는 것이 당시의 통념이었다. 이에 따라 말을 듣지 않던 부하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다케다 신겐도 출가한다고 위협을 가한 적이 있다.]했고 토시이에도 자신이 부재중의 대리인으로 형 토시히사를 내세우기도 한 것을 보면 화해했다고 추측된다. 이런 사정 때문인지 조카인 [[마에다 케이지]]와의 관계는 서로 못 죽여서 안달인 것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많으나 후세의 창작이라고 생각된다. 케이지 자신도 마에다 가문에서 나가며 가족을 남겨두고 간 것을 보면 양자의 관계는 좋지는 않더라도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다. 한 겨울철 케이지가 물을 덥혀놓았으니 탕에 들어가라고 권하여 토시이에가 탕에 들어갔는데 실은 냉탕이었다, 같은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이것은 후세의 창작인 듯 하다. 하지만 케이지가 토시이에에게 장난을 자주 쳤다는 것은 진짜였을 가능성이 높다고. 관점을 달리 해서 보면 삼촌에게 그렇게 장난을 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관계였다고 볼 수도 있겠다. 사촌이자 아내인 [[호슌인|마츠]]와는 금슬이 무척 좋았던데다[* 정략혼이 많은 이 시기에 꽤나 드문 연애혼이었다고 한다. 재미있는건 친한 사이이자 주군이었던 히데요시 부부도 연애혼이었다는 것.] 아이를 많이 가지는 사람이 많았던 옛날 사람이라는걸 고려해봐도 총합 11명이라는 자식을 둔 걸로도 익히 알려져있다. 그러나 최후까지 도요토미 가문을 택하고 지키라고 신신당부했던 토시이에와 달리, 마츠는 토시이에 사후 그보다 빠르게 시국을 읽고는 아들들에게 '니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니들 아버지만은 못하니 걍 기어라' 라고 가문 방침을 못박으면서 사실상 도요토미 가문도 여차하면 포기할 수 있는 식으로 태세전환을 했고, 그런 빠른 태세전환 덕에 오히려 마에다 가는 도쿠가와 막부 시절에도 다이묘로서 존속할 수 있었다고 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